[Critic] 최혜심의 ‘사랑’

신항섭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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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심의 ‘사랑’

환상적이고 초월적이며 신비적인 조형언어

 

 

신항섭(미술평론가)

 

그림은 현실적인 미를 찬미하는가 하면, 상상 또는 환상적인 비현실적인 미를 추구하기도 한다. 화가의 조형적인 상상력은 결과적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냄으로써 현실공간을 상상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림을 통해 현실과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이란 어차피 화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나 인생관을 투영하는 것이고 보면 주관적인 시각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그 주관적인 시각이야말로 창작의 원천일 수 있는 것이다.

최혜심은 그림과 문자언어가 병립하는 독특한 조형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림과 문자가 하나의 몸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어쩌면‘숨은 그림 찾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문자가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문자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는 조형적인 기교라고 할 수 있는데, 문자와 현실적인 이미지라는 서로 어울릴 듯싶지 않은 관계를 교묘한 방법으로 묶어 놓는 조형적인 발상이 신선하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문자는 한글의 ‘사랑’이라는 단어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다양한 형태로 변신하면서 그림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든다. 이를테면 한자의 상형문자처럼 한글의 ‘사랑’이란 단어 또한 그림으로서의 형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상형문자인 한자를 풀어내면 곧바로 그림으로 바뀔 수 있으나 표음문자인 한글은 애초에 형상과는 상관없다. 그럼에도 그는 한글을 그림의 일부로 바꾸어 놓는 조형적인 마법을 즐긴다.

그의 작품을 보면 도처에 ‘사랑’이라는 글자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글자로서의 독립적인 지위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풍경 속의 나무나 꽃 또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환하면서 보이는 듯 마는 듯 숨겨지는 형태로 자리할 따름이다. 꽃이나 열매는 물론이려니와 사람이나 구름의
이미지가 ‘사랑’이라는 글자로 표현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그런데도 이상스럽다거나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자연물의 형태 그 일부분으로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이는 누가 상상하지 못한 그만의 조형적인 아이디어이다. 어쩌면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그대로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다가 ‘사랑’이라는 문자 자체를 그림으로 형상화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감정을 푸근하고 따뜻하게 만든다. 그리고 행복하고 즐거운 감정을 유발한다. 아무리 악인일지라도 사랑이라는 힘은 간단히 악의 감정을 감쪽같이 용해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꿈과 희망과 행복과 낭만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이라는 말은 참으로 신비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가 ‘사랑’이라는 문자언어를 작품에 직접 대입시키는 것은 그처럼 신비한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작업의 주제로 삼는 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데 기여하는 화가로서의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서로를 아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며 감싸 안는 드넓은 포용력을 뜻한다. 그는 이와 같은 사랑의 신비한 힘을 형상화함으로써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이처럼 마술과 같은 사랑의 힘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다. 밝고 맑으며 순수하며 아름다운 소재 및 색채이미지가 지배한다. 그와 같은 그림을 보면서 나쁜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듯이 그의 작품은 시각적인 즐거움으로 충만하다. 소재는 물론이려니와 색채이미지가 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폭넓은 의미와 일치한다. 그가 ‘사랑’이라는 문자를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줄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라고 믿는 까닭인지 모른다. 이는 그림의 내용에 관한 문제이다. 문자언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대로 그림의 내용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문자를 조형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 그의 작업은 저절로 내용이 갖추어져 있다.

그의 작품에서 문자는 독립적인 형태 및 의미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형상을 빙자하거나 거기에 동화되는 방식으로 자리한다. 문자가 은폐되거나 형상 속으로 녹아 드는 상황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문자는 그림의 형식에도 관여하지만 그보다는 내용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다시 말해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 즉 내용을 주도하고 지배하는 작품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가령 인물 몇 사람이 모여 있는데 자세히 보면 인물 하나하나가 모음이나 자음의 역할을 하면서 사랑이라는 문자를 완성한다. 하지만 이들 사람을 보면서 곧바로 사랑이라는 문자를 읽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의 형상으로 은폐되고 은닉되며 변형되는 까닭이다.

그의 작품은 때로는 전면회화 형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은 열매들이 화면 전체를 덮고 있다. 거기에도 인간의 문자가 무수히 존재한다. 과일 꼭지가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글자를 형성하는 자음과 모음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춤추는 여인이라든지 꽃과 열매로 가득 채워진 무릉도원과 같은 풍경은 물론이요, 바다풍경이나 우주의 이미지에도 ‘사랑’이라는 문자가 은둔하듯 자리한다.

어느 면에서 그의 작업은 실재하는 물상의 형태를 묘사하는 그림과 문자언어로 기술하는 문학이 하나의 관점으로 통합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작품에 따라서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농후하다. 문자가 들어갔기 때문에 문학적이 아니라, 작품 전체적인 정서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문학이나 그림의 서정성은 꿈과 사랑과 행복과 낭만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품 속에 표현되는 서정성은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이며 신비적인 이미지와 공존한다. 그리하여 현실세계와는 또 다른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 미술과 비평 게재 –